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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사회

[앙리 마티스]색의 마술사이자 야수파의 창시자.

by v슈뢰딩거 2020. 8. 15.

 

앙리 마티스는 19세기~20세기 자연주의를 반대하고 색의 아름다움과 심리적인 힘을 찬양하는 예술 운동중 하나인 야수파를 창시한 화가중 한명이다. 역사를 잘 모를때 야수파라는 단어를 들었을때는 대단히 강렬한 무언가가 있는 것인줄 알았는데, 색과 관련된 용어 여서 깜잘 놀랐었다. 그리고 마티스가 그린 춤추는 인물들의 벽화와 말년에 만든 거대한 종이 오르기 작품은 그의 예술성에 대해 알수 있다.

<네이버, 그림으로보는 교과서인물 참조>


앙리 마티스의 탄생과 성장


앙리 마티스는 프랑스 북부인 르 샤토 캉브레시 피르카디에서 태어났다.안락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마티스는 처음에 법률을 공부하여 법학 학위도 받았고, 재판행정담당의 서기가 되어 일하게 된다. 미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생을 살던 마티스는 맹장염에 걸려 몸이 회복되는 동안에 그림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티스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파리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아카데미 줄리앙에 등록해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 밑에서 미술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그다음 해에 마티스는 상징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모로의 작업실로 초대 받았다. 게다가 에콜 데 보자르 미술학교에 입학해 옛 대가들의 그림을 모방하면서 그림을 배웠다. 모방미술을 할 당시의 마티스의 그림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느낌을 띄고 있었다.

 

1890년대 후반에는 코르시카 섬에서 잠시 체류한 후 다시 파리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과거의 전통을 깨고자 하는 젊은 화가 집단을 이끌게 되었다. 이 화가 집단은 1905년 정식 살롱의 그림과 판이하게 다른 그림으로 예술계에 대단한 충격을 일으키게 된다. 이들은 활력없는 무생물 보다는 생생한 컬러를 이용하고 어린아이 같은 구도를 사용 하게 되었다.

그런 화법을 반대하는 비평가들은 그들을 포악한 짐승이라는 의미로 야수파라 부르게 된다.하지만 호평도 많고, 많은 이들이 그들의 그림을 사랑하게 되며 야수파에서 '야수주의'라는 하나의 미술 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로 변하게 되었다. 이 당시 마티스가 그린 대표적인 작품은 <삶의 기쁨>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나체의 여성들이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을 그렸다.

 

여러가지 면에서 마티스의 목표는 표현주의자들의 목표와 같았지만 마티스 본인은 부정적인 감정을 깊이 생각하고 표현하는 그들의 성향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곤 했다. 마티스는 자신의 예술이 즐거움을 이끌어 내고 "물리적 피로감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편안한 안락의자 같은 것"이 되기를 원했다.

 


파리에서 리비에라로


1920년대에 마티스는 리비에라 지방의 니스로 거처를 옮겨 여생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니스에서 그렸던 마티스의 그림에서(매력적이고 관능적인 오달리스크와 열려진 창문 너머로 리비에라의 전경이 보이는 실내 장면을 담은 그림)그의 미술 양식과 색채 사용은 강렬하고 분명해졌다. 그런 작품들로 인해 마티스는 1925년에 미술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930년대 부터 마티스는 주로 삽화 작업에 전념 했었는데, 1941년에는 십이지장암 수술을 받고 난후 이젤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무척 힘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마티스는 좌절하지 않고 그의 유명한 '종이 오리기'를 작업하기 시작했다. 종이 오리기의 장점은 침대나 안락의자에 누워서 할 수 있는 작업이였고 조수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였다. 조수들은 밝은 색채들을 구아슈에 색칠했고 마티스는 그 위에 자신의 종이들을 덧 붙였다. 마티스는 말년에 이런 추상적이고 소박한 새로운 미술 양식에 푹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종이 오리기'를 통해 자신의 미술영역을 더 높게 완성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1944년 재즈에 관한 글을 써서 삽화집을 제작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되고 그는 '종이 오리기'를 통한 작품을 만들어 앨범을 장식하기도 했다.이 작품의 제목은 이카루스로 하늘을 날던 소년이 추락하고 있으나 이를 기쁨의 춤을 추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 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이 '종이 오리기'를 가위로 그림을 그렸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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