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 근처에 독립문이 서 있습니다. 일본에서 독립한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 생각하는 분이 많은데, 세워진 해는 1896년입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훨씬 전입니다. 그럼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이었을까요. 그 질문에서 독립협회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독립협회는 어떤 단체였을까
1896년 7월 2일에 창립됐습니다. 성격이 한 번에 정해진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변했습니다.
→ 처음에는 관료와 지식인이 모인 사교 단체에 가까움
→ 이후 신문과 강연으로 대중을 깨우는 계몽 단체로 확장
→ 마지막에는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대안을 요구하는 정치 단체로 성장
2년 반 남짓한 기간에 이 변화를 다 거쳤습니다. 조선에 근대적인 의미의 시민 정치가 등장한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이었을까
독립문이 세워진 시점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바로 전해에 을미사변이 있었고, 1896년 2월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 있었습니다. 청은 청일전쟁으로 물러났지만 그 자리를 일본과 러시아가 번갈아 채우고 있었습니다.
즉 특정 한 나라가 아니라, 어느 나라에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 서는 것이 당시의 독립이었습니다. 독립문이 청의 사신을 맞던 영은문 자리 근처에 세워진 것도 그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사대의 상징이 있던 자리에 자주의 상징을 세운 것입니다.

서재필과 독립신문
중심 인물은 서재필입니다. 이력이 특이합니다.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인물입니다. 그곳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독립협회를 이끌었습니다. 10여 년 전에는 궁을 무력으로 장악하려 했던 사람이, 이번에는 신문과 토론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그 도구가 독립신문이었습니다.
한글로 발행해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했고, 정부가 하는 일을 알리고 따졌습니다. 정보를 가진 사람만 정치에 참여하던 구조가 여기서 흔들립니다.
만민공동회, 사람들이 직접 말하기 시작했다
독립협회가 남긴 가장 큰 것은 만민공동회입니다.
신분과 직업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모여 나랏일을 토론하고 요구를 정리해 정부에 전달하는 자리였습니다. 학생들에게 토론과 타협을 가르치는 협성회 같은 조직도 함께 운영됐습니다.
절정은 1898년 가을이었습니다.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엿새 동안 종로에서 관민공동회가 열립니다. 관리와 백성이 한자리에 앉아 국정을 논의한 것인데, 조선에서 이런 자리가 열린 적은 없었습니다.
왜 강제 해산됐을까
절정에서 두 달도 안 돼 끝났습니다.
1898년 12월 23일, 정부가 군대를 투입해 만민공동회를 포위하고 무기로 위협해 해산시킵니다. 이틀 뒤인 12월 25일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가 모두 해산됩니다.
이유는 권력의 문제였습니다. 독립협회는 의회와 비슷한 기구를 만들어 정부를 견제하려 했습니다. 황제의 권한을 나누자는 요구였습니다. 고종은 그 무렵 황제로 즉위하며 황제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으니, 두 방향이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여기에 독립협회가 정치 단체로 커지는 것을 경계한 세력들의 공작도 겹쳤습니다. 결국 힘을 가진 쪽이 군대를 썼습니다.
남은 것과 남지 않은 것
독립협회는 2년 반 만에 사라졌지만 흔적은 남았습니다.
한글 신문이 여론을 만든다는 경험, 신분과 무관하게 모여 토론한다는 경험, 그리고 정부에 공개적으로 요구할 수 있다는 경험입니다.
이후 애국계몽운동과 언론 활동이 이 경험 위에서 이어집니다.
남지 않은 것은 제도입니다.

견제 기구를 만들려던 시도는 무산됐고, 황제권은 강화된 채로 대한제국이 운영됩니다.
밖에서 열강이 밀려드는 동안 안의 힘을 모을 장치가 사라진 셈이라, 이 해산은 단체 하나가 없어진 일로만 보기 어렵습니다.
다시 요약하면,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창립해 사교 단체에서 계몽 단체를 거쳐 정치 단체로 성장했습니다.
서재필이 이끌며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신문을 발행했으며,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로 시민 정치의 장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황제권 강화와 충돌하면서 1898년 12월 군대에 의해 강제 해산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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