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을 하려면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기존 관료 조직은 이미 특정 세력의 손에 있었습니다. 정조가 즉위한 해에 만든 것이 군대나 감찰 기구가 아니라 책을 모으는 기관이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도서관처럼 시작한 곳이 어떻게 개혁의 본부가 됐는지 정리했습니다.
규장각은 무슨 뜻일까
이름부터 보면 성격이 보입니다.
→ 규장(奎章)은 임금이 지은 시문이나 글을 가리키는 말
→ 각(閣)은 건물, 기관
임금의 글을 보관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1776년 11월, 정조는 창덕궁 후원 북쪽에 이 기관을 세웁니다. 즉위한 바로 그해였습니다.
역대 왕의 글과 왕실 문서를 정리해 보관한다는 명분은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새 왕이 선왕들을 받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도서관에서 개혁 본부로
명분은 보관이었지만 실제 기능은 빠르게 확장됩니다.
→ 국내외 서적을 대량으로 수집하고 정리
→ 학자들이 모여 연구하고 책을 편찬
→ 왕이 신뢰하는 관료들이 모여 정책을 논의
핵심은 마지막입니다. 규장각의 관원, 즉 각신은 왕과 직접 접촉하며 정책을 다뤘습니다. 기존 관료 조직을 거치지 않고 왕의 뜻이 움직일 수 있는 통로가 만들어진 셈입니다.
정조에게 이것이 필요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정쟁 속에 죽는 것을 지켜보고 즉위한 왕이었습니다. 기존 조직이 누구 편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기 사람을 기르고 모을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초계문신, 젊은 관료를 다시 가르쳤다
1781년부터 시행한 제도가 초계문신입니다.
→ 37세 이하의 젊은 문관 중 재능 있는 사람을 선발
→ 규장각에서 다시 교육하고 시험
→ 왕이 직접 수업에 참여하거나 시험 문제를 내기도 함
과거에 합격한 사람을 다시 가르친다는 발상입니다.
시험에 통과한 지식과 실제 정책을 다루는 능력이 다르다고 본 것입니다.
효과는 두 겹이었습니다. 실무 능력을 갖춘 관료가 양성되고, 그 관료들이 왕에게 직접 배웠으니 왕의 개혁 방향을 이해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인재 양성과 지지 기반 확보를 한 번에 한 제도였습니다.
검서관 네 자리를 서얼에게 주다
가장 눈에 띄는 조치입니다. 규장각의 검서관 네 자리는 모두 서얼에서 임명했습니다.
서얼은 양반의 첩에게서 난 자손을 가리킵니다.
능력과 무관하게 관직 진출이 제한돼 있던 신분이었습니다.
검서관은 각신을 도와 서적을 편찬하고 간행할 때 교정과 필사를 담당했고, 간행된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형식상으로는 잡직이어서 각신의 반열에는 들지 못했지만, 실제로는 재능을 인정받는 청요직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조치가 갖는 의미는 상징을 넘어섭니다. 신분 때문에 쓰이지 못하던 사람들이 실제로 국가 사업에 참여하게 됐고, 그중에서 당대 최고 수준의 학자들이 나옵니다.
정조가 인재를 어디서 찾으려 했는지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정조의 개혁에서 규장각의 자리
정조의 사업들을 나란히 놓으면 구조가 보입니다.
→ 규장각: 사람과 지식을 모으는 곳
→ 장용영: 왕이 직접 쥔 군사력
→ 신해통공: 특권을 회수한 경제 개혁
지식과 무력과 경제, 세 방향에서 각각 자기 기반을 만든 것입니다. 규장각은 그중 사람을 담당했습니다. 정조가 어떤 왕이었는지를 보면 이 사업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설계였음이 드러납니다.
정조 사후 규장각의 정치적 기능은 줄어듭니다. 다만 이곳에 쌓인 자료와 편찬물은 남았고, 지금도 조선 후기를 연구하는 기초 자료가 됩니다.

장용영이 2년 만에 혁파된 것과 달리 규장각이 살아남은 이유는, 그 명분이 처음부터 책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요약하면, 규장각은 1776년 정조가 창덕궁에 세운 기관으로 임금의 글을 보관한다는 명분으로 출발했습니다.
실제로는 서적 수집과 편찬, 초계문신 제도를 통한 인재 재교육, 정책 논의를 맡은 개혁의 본부였고, 검서관 네 자리를 모두 서얼에게 주어 신분의 제약을 넘어 인재를 등용했습니다.
📌 같이 보면 좋은 글
→ 정조는 어떤 왕이었나, 사도세자의 아들이 만든 조선의 르네상스
→ 장용영 뜻과 설치 배경, 정조는 왜 자기만의 군대를 만들었을까
→ 신해통공 뜻과 배경, 정조는 왜 시전의 독점권을 빼앗었을까
→ 사도세자는 왜 뒤주에서 죽었을까 광증과 당쟁 실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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