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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사회

[한국사-정보]서울 4 대문의 유례 및 6조 직계제의 6조

by v슈뢰딩거 2020. 9. 13.

이성계,정도전,이방원 등에 의해 완성된 유교의 국가 조선은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하면서 1395년 이후 현재 서울의 4개의 산을 이어 큰 산성을 축조하였다. 4개의 산은 동쪽의 낙산 , 서쪽의 인왕산 , 남쪽의 목면산 , 북쪽의 북악산이다. 

 

그리고 산성 내부에 궁궐을 건립하여 법궁인 경복궁과 이궁(동궐)인 창덕궁, 창경궁등을 만들었다. 


서울 4대문의 유례


이후 동,서,남,북 4개의 대문을 설치하였으며, 4개의 대문은 각각 유교의 오상인 인,의,예,지에 의거하여 건축 되었다.

 

 

동 : 흥인지문 - 인을 일으키는 문이라는 뜻에 흥인문이였으나, 동쪽에 오랑케들이 자주 쳐들어온다하여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추가로 더 쌓고 지(之)를 추가하여 흥인지문이라고 하였다. 현재 우리나라 보물 제 1호이다.

 

서 : 돈의문 - 의를 돈독히 하라는 뜻에 돈의문이라 지었고, 1915년 일제 시대에 도로를 확장한다는 이유로 헐어버려 현재는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남 : 숭례문 - 예를 숭상하라는 뜻으로 숭례문이다. 숭례문은 우리나라 국보 제 1호이고,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숭례문의 경우 관악산의 화(火)기운을 누르기 위하여 현판을 세로로 적었다고 한다. 2008년에 큰 화재 사고로 피해를 입었으며, 2013년 복원이 완료 되었다. 정도전은 숭례문이 불에타버리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었는데 아마 그당시에는 외구들의 침입의 우려로 사용되었던 말인것 같다.

 

북 : 숙지(정)문 - 지혜로움을 갖추라는 뜻으로 숙지문이라 하였다. 하지만 북쪽은 찾는 이가 없어 숙지문을 숙정문이라 불렀다. 북쪽의 문은 사람들의 출입을 위한 문이 아니라 비상시에만 개방하는 문이였다.

 

또 한 4대문 말고 4소문도 있었다. 4소문이란 동소문(혜화문), 서소문(소의문), 남소문(광희문), 북소문(창의문)을 일컫는다.

 


조선시대 6조란?


조선에는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 존재하는 큰 행정집단 6개가 존재 하였는데, 이를 6조라 불렀으며 현재의 국가 기관과도 많이 닮아 있다. 예전에는 경북궁앞 광화문 양측으로 6조 거리가 있었는데 이곳에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 등이 양편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런 6조의 역화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이조 : 현재의 내무부와 역활이 같으며 나라의 내무를 살피고 문관들에 대한 인사행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관직에 등용된 사람들에게 직책을 정하고, 공을 치하하는 역활을 하였다.

 

2. 호조 : 현재의 재정, 경제부와 역활이 같으며 인구, 가구, 토지를 조사하고 조세를 얼마만큼 부과할지에 대한 논의를 거쳐 조세를 걷는 역활을 하였다.

 

3. 예조 : 현재의 교육부,외교부와 역활이 같으며 사신들의 접대, 국가교류에 대한 일을 맡아 담당하였다.

 

4. 병조 : 현재의 국방부와 역활이 같으며 군사, 군비, 전쟁등에 관한 일들과 무관들의 인사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5. 형조 : 현재의 법무부, 경찰청과 열활이 같으며 법률 및 사건발생시 소성 그리고 죄에 대한 형벌을 내리고 노예들의 관리 또한 맡아 하였다.

 

6. 공조 : 현재의 기술부와 역활이 같으며 물건을 만드는 현재의 공장같은 것들에 대한 건설이나 궁에서 하는 여러 공사들에 대한 관리를 맡아 하였다.

 

 

 

그리고 의정부라는 기관에서는 위의 6조를 관리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신권이 강하면 의정부의 권한이 강해졌고 왕권이 강하면 의정부의 권한이 약해졌다. 이는 다른식으로 이야기하면 왕권이 강할때는 6조 직계제를 신권이 강할때는 의정부서사제를 채택하여 운영하였다. 특이하게도 세종은 왕권이 강하였으나 의정부서사제를 채택하고 인사권과 군사권만 왕이 직접 관리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합을 잘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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