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5대왕인 문종은 1413년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문종은 8살이 되던해에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문종은 세종을 닮아 학문을 좋아하고 학자들을 아끼며 사랑하였으며, 신권과 왕권의 조화를 위해서도 무척이나 노력하였다. 문종은 왕세자 시절에 혼인을 하게 되는데 첫단추를 잘못끼워서인지 문종은 부인복이 없기로 유명하다.
문종의 3명의 부인
문종의 첫번째 부인은 휘빈김씨로 휘빈은 문종의 사랑을 크게 받지는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녀의 시녀와 함께 잡술을 행하게 된다. 예를 들어 문종이 아끼던 시녀들이 있었는데 그 시녀들의 신발을 불로 태워 문종의 술에 타서 주거나, 뱀이 교미를 할때의 체액을 묻히는 행위들이였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들은 결국 발각되게 되어 세자빈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두번째 부인은 순빈봉씨로 순빈은 휘빈의 실패로 문종이 좋아할만한 외모를 가진이를 세종과 소헌왕후가 간택하게 된다. 하지만 문종은 여자보다는 학문을 배우는것이 더욱 좋았기 때문에 순빈 또한 휘빈과 같이 관심을 관심을 받지는 못한다. 그래서 처음 세자빈으로 왔을때의 조신한 모습은 없어지고 술을 벗삼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세종과 소헌왕후는 아기를 보고 싶어했고, 후궁3명을 더 들이게 된다. 순빈은 자신이 받지 못한 사랑을 후궁들이 받을까 후궁들을 괴롭히기 시작했고 이런 모습들을 알게된 문종은 더욱 순빈에게 향하는 발길을 끊게 된다. 그 뒤 순빈은 자신의 궁녀와 동성애에 빠지게 되고, 이런 행각들이 발각되어 휘빈처럼 왕실에서 추방되게 된다.
세번째 아내인 현덕왕후는 순빈봉씨가 세자빈으로 있을시절에 후궁이였으나 순빈이 왕실에서 쫓겨나며 세자빈으로 승격되었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하루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며 이후 문종이 왕위에 올라 현덕왕후로 추존되게 된다.
세명의 아내와 이별하게된 문종은 이후 새로운 왕비를 맞이 하지 않는다.
문종의 업적과 생애
문종은 세자시절 하연을 스승으로 두어 학문을 닦았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인품이 훌륭하여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이 문종을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종은 29년간의 왕세자 기간동안 문신과 무신을 골고로 등용하였고 민심을 잘 헤아리며 아버지 세종의 정치를 보필하였다. 1442년 세종이 병상에 누워 국정이 힘들때에는 8년간의 대리청정도 하였다고 한다.
세종 말기에 업적들은 문종의 업적과도 같은데, 장영실이 발명했다 하는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구인 측우기는 사실 문종의 작품이며 문종은 천문학과 산술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또한 재위기간동안 언론의 활성화에 힘썻으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편찬을 완성하였고, 병법의 정비 및 화포의 규격화와 화차개발도 하였다고 한다.
문종이 즉위한 1450년에는 오랜 대리청정으로 인해 정사처리에 문제가 없었다고 하니 정말 준비된 왕세자였다. 하지만 몸이 약한것이 흠이였으니, 세종은 죽을때 자신의 아들역시 오래 살지 못할것임을 알고 있어서 세손인 단종의 거취를 무척이나 걱정하였다고 한다.
세종의 걱정이 현실로 들어났으니.. 문종은 세종과 어머니의 삼년상을 연속으로 치루며 좋지않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래서 어린단종을 대신해 김종서가 섭정을 맡기도 하였다. 하지만 문종은 즉위 3년을 넘기지 못하고 39세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 조선시대 기준으로 미남은 짙은 턱수염과 풍채가 위엄이 있는 사람을 미남으로 삼았는데, 조선후기에 발견된 문종이라 추정되는 초상화를 통해 문종은 그시대의 수려한 외모를 가진 존잘남인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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